이러한 호황기 때 투기꾼들의 광기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발휘한다. 이 시기에 그들은 아주 정열적이고 허풍스러우며 탐욕스럽게 된다. 심지어는 섹스에 탐닉하기도 하고 산만해지며 수익에 대한 기대치는 하늘을 찌를 듯 하다. 그러다 광기의 탐욕은 마침내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웬만한 투자관련 서적들이 군중의 미망과 광기의 역사에서 최초의 투기사례로 꼽으며, 주식투자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하여 즐겨 인용하는 네덜란드 튤립 투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63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투기적 광풍이 열병처럼 퍼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전 세계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잡았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하여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당시 유럽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인들은 앞다투어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황을 만끽했고, 부동산 가격은 급상승했다. 막대한 무역흑자로 과잉유동성이 네덜란드를 흥청거리게 했다. 풍요와 오만에 젖은 네덜란드인들이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고, 그들의 눈에 띈 것이 바로 튤립이었다.
불행의 씨앗, 튤립은 1573년 터키 술레이만에 파견된 네덜란드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튤립뿌리를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크루시우스에게 선물하면서 네덜란드에서 번식이 시작되었다.
국토가 좁은 탓에 대형 공원을 가꿀 수 없었던 네덜란드인들은 앙증맞은 공원을 만들어 한가운데에 가장 아름다운 꽂을 심었고, 기름진 땅은 튤립이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는 환상적인 조건이 되었고, 튤립의 우아한 모양과 선명한 색깔은 유럽 전역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줄무늬가 있는 것은 '황제튤립', 이어 '총독'과 '제독', '장군' 순으로 이름을 붙혔다. 1624년 황제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과 맞먹는 1,200플로린(florin, 당시 유통된 금화)에 거래되었다.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튤립의 독특한 불확실성이 투기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하나의 뿌리가 황제튤립을 터트릴 수도 있었고, 평범한 꽃잎을 터트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색상의 튤립을 피게 하는 원인이 뿌리에 감염된 바이라스 때문이라는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뿌리는 땅 한 뙈기만 있으면 쉽게 경작할 수 있었다. 당시 고가주였던 동인도회사의 주식에 투자할 돈이 없었던 가난한 서민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그대로 튤립 한 뿌리에 모든 것을 걸었다. 값비싼 뿌리는 쪼개어 아스(aas, 20분의 1그램) 단위로 거래되었고, 평범한 뿌리들은 두렁 단위로 거래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튤립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프랑스인들도 한 몫 챙기기 위해 1634년 파리 근교와 프랑스 북부에 튤립시장을 열었다. 튤립 광풍이 국제화된 것이다.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사람들은 직공과 박적공, 구두장수, 빵가게 주인, 채소장수, 농사꾼 들이었다.
1636~1637년, 겨울에는 튤립뿌리들이 아늑한 땅 속에 묻혀 있어 거래가 성사되어도 투기꾼들은 뿌리를 인도할 수 없어 '바람거래'로 불린, 어음결재로 이루어지는 튤립 선물거래가 생겨났다.
투기꾼 가운데 6만 길더를 벌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이 손에 쥔 것은 현금이 아닌 어음이었다. 투기 열풍이 끝나갈 무렵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튤립뿌리는 돌고 돌아 실체가 없는 거래가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노동자들이 1년 동안 벌어들인 돈은 200~400길더 수준이었다. 한 가정의 1년 생활비는 보통 300길더 정도였고, 최고 수준의 꽃그림 한 폭이 1,000길더 쯤에 거래되었다.
노란색 평범한 튤립뿌리 1파운드는 20길더에서 단 일주일 만에 1,200길더로 치솟았고, 2년 전 2,000길더였던 황제튤립 뿌리는 6,000길더에 거래되었다. 이는 3,000길더에 거래된 총독튤립의 두 배에 달하는, 노동자 30년 연봉에 해당하는 값으로 치솟았던 것이다!
튤립의 적정가격이 얼마인지를 밝히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마침내 1637년 2월 3일 튤립시장이 붕괴했다. 현물을 인도하거나 결제해야 하는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갑작스런 시장붕괴의 원인은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매매는 이뤄지지 않았고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집을 저당 잡히고 가재도구들을 팔아 일확천금을 노렸던 그들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비극의 주인공 가운데 유명한 풍경화가 '얀 반 고엔'은 파국 하루 전에 900길더와 자신의 그림 한 폭을 주고 튤립 한 뿌리를 구입했다가 이후 19년 동안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다 숨을 거둬야 했다.
튤립 시장의 불안은 1년 뒤인 1638년 5월까지 계속됐고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가격의 3.5%만을 지급하는 것으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하도록 명령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1,000길더를 받기로 하고 튤립을 팔았던 사람은 35길더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설명할 수 없는 투기광풍에 왜 뛰어 들었을까. 튤립 한 뿌리를 사는 동기는 짧은 기간 안에 '나보다 더 바보'에게 팔아넘겨 큰 시세 차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니발이나 축제기간에는 도박이 널리 행해졌고, 일확천금 앞에서는 신분구별은 의미가 없었다. 그 순간 만큼은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것이다. 카니발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화는 불경스럽고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카니발과 축제의 분위기는 투기적 광기에 전승되어 온다. 카니발과 마찬가지로 투기 역시 세상을 한바탕 뒤집어놓으며 한 마을의 바보가 왕 노릇을 한다.
꿈처럼 비현실적인 투기적 광풍은 죽음에 다다를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오르가슴의 끝없는 행진과도 같다. 과시적 소비와 투기꾼들의 흥청거림은 자유를 사랑하고 위선을 혐오하며 무정부적인 불경함으로 신분질서를 파괴한다. 집을 저당잡히고 튤립 뿌리를 샀던 노동자들의 눈동자와 가슴에는 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네덜란드는 세계 제일의 경쟁력을 갖춘 화훼산업 국가가 되었다. 튤립의 아름다움에 취해 투기를 벌였던 1630년대 그들은 미래를 내다보는 천리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가 너무 늦게 왔지만.
* 이 글은 에드워드 챈슬러 저, 강남규 역의 <금융투기의 역사>(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1년) pp. 41-61의 내용을 참고하여 조클닷컴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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